둘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알 수 있다.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배어나온다.
(2007-09-07)
내 인생의 기준은 '개인의 안녕과 세계의 평화'이다.
거창하게 세계 운운한다기 보다는 일단 내가 평안하면 스스로 내 주위를 돌아볼 여력도 생기는 것이고 그렇게 내 주변이 평화로울 수 있도록 내가 노력한다면 그것이 세계평화를 위한 시작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평안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내 인생을 걸어왔다.
무난하게 많이 스트레스 받지 않고 편안히 살 수 있도록 말이다.
나도 돈 많이 버는 게 좋고, 높은 직위나 명예도 좋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얻으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그렇게 힘들게 노력하는 것이 싫어서 내 기준으로 대강 이정도면 되었다 싶을 정도의 노력과 그에 따른 결과를 얻을 뿐이다.
지금의 내가 아주 자랑스럽다거나 매우 만족스럽다고 말하긴 어려워도 이정도면 나쁘진 않다고 본다.
난 딱 이만큼의 노력과 열정을 보였을 뿐이니 내가 한만큼 돌려받았다고 해서 억울해하면 안되지 않는가.
초등학교 6학년때 '장래희망'을 적어내면서 내가 원한다고 해서 이 직업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내가 좀더 열정이 있었다면 누구나 원한다고 다 그 직업을 갖는 것은 아닐지라도 이 꿈을 위해 불타올라 노력해서 원하는 직업을 쟁취해야겠다고 생각했겠지만, 나는 그 이후로 딱히 장래희망같은 것을 꿈꾸지 않았다. 그래서 학교에서 장래희망을 적어내라고 하면 적당히 그 시절에 인기있는 직업을 적어냈다. 기자나 건축가 따위..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이 때에 좀더 내 삶에 열의를 갖고 있었어야 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려서부터 나는 글짓기를 좋아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는 전국대회(어떻게 출전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에서 3등인가 4등을 하기도 했고 (이때 한번뿐-_-) 고등학교때에는 근처 학교들끼리 모여서 하는 글짓기 대회에서 2등을 하기도 했다.(이것도 교내에서 의무적으로 하는 글짓기 숙제를 냈을 뿐인데 나도 모르게 출품되어서 나도 모르게 수상한 것이다.)
내가 글쓰기를 좋아했던 것치고 이런 글짓기 대회에 나가거나 글쓰는 훈련을 받는 것에 상당히 무지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한참 창작열에 불타올라(아무래도 사춘기) 예쁜 노트 한 권을 내가 만든 시 들로 가득 채우기도 했고, 같은 반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 받거나 일기를 나눠쓰는 일도 했다.(이런건 사춘기 소녀면 누구나 하는 일인가요? 굳이 글쓰기를 좋아하거나 창작열에 불타지 않아도-_-?) 성당 문집동아리로 활동하기도 했고.(그 문집들 다 어디갔나;;) 아무튼...
하지만 내가 대학에 들어와서 작문동아리같은 것에 들어가지 않은 이유는 내가 작품이랍시고 만드는 시나 산문들이 치졸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도하지도 않고 지레짐작으로 포기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 나이때에 작품을 만드는 다른 이들을 폄하할 생각은 전혀없거니와 처음부터 완성된 작품을 만드는 사람도 참으로 드물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그런 부끄러운 (작품이라는 이름의) 것을 만들고 대중에게 보여야 한다는 것이 정말 부끄러웠다. 그러나 애초에 발전할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것부터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겠지.
이후 나는 내가 바라고 하고싶어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을 지라도 무난하고 평범하며 '노력하지 않는' 편한 길을 걸었다.
나는 그것이 '나의 안녕'을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노력하지 않고 딱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니 이 어찌 편하지 아니하겠는가.
그런데 이런 기조로 거의 10년을 지내와보니 그동안 나도 모르게 빈 창고에 먼지가 쌓이듯 조금씩 켜켜이 쌓여온 무언가가 '지금의 나'에게 부담이 되고 있다.
신혼여행까지 마치고 온 지금.
가만 다시 생각해보면 아쉬운 점이 많다.
드레스 촬영도, 예식도, 여행도
이렇게 이렇게 하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계속 올라온다.
다 끝나버렸는데 왜 이렇게 미련이 남는지 모르겠다.
할 수만 있으면 다시 하고 싶으네...
그럼 더 잘 할 수 있을 것만 같은데 말이죠^^
| 첫 청각장애 사제 박민서 신부 | |||
| 입력: 2007년 06월 25일 18:47:06 | |||
한국 최초로 청각장애인 가톨릭 신부가 탄생한다. 다음달 6일 서울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정진석 추기경의 집례로 열리는 가톨릭 서울대교구 사제서품식에서 청각장애인인 박민서 베네딕토 부제(39)가 성품성사(聖品聖事)를 받고 사제가 된다.
그는 지난해 7월 부제로 서품돼 교회법에 따라 1년 동안 신부가 되기 위한 과정을 마쳤다. 청각장애인의 사제 서품은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가톨릭교회에서도 그가 처음이다. 세계적으로도 미국, 영국, 스페인, 뉴질랜드, 브라질, 남아공 등에서 14명의 농아 사제가 활동하고 있을 뿐이다. 경기도 고양에서 태어난 박 베네딕토 부제는 3살 때 약물복용 부작용으로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됐다. 중학교까지 일반 학교를 다닌 그는 서울농학교(옛 선희학교) 고등부를 거쳐 경원전문대 산업디자인과를 나와 일반 직장에도 근무했다. 그는 고교 2학년 때 당시 신학생으로 서울 세종로 에피타주일학교에서 활발한 농아선교활동을 펼치던 서울 가톨릭농아선교회 정순오 신부(54·번동성당 주임)를 만나면서부터 사제의 꿈을 키웠다. 이날 인터뷰도 정신부의 수화 통역으로 이루어졌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장애 때문에 사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해 절망할 때마다 정신부님이 희망을 잃지 않도록 격려해주셨습니다. 사제가 되는 길이 험난했지만 여러분들의 기도와 도움 덕분에 서품을 받을 수 있게 됐습니다.” 1994년 정신부의 주선으로 미국유학을 떠난 그는 세계 유일의 농아종합대학인 갈로뎃대에서 철학을 공부한 뒤 성요셉 신학교를 거쳐, 2004년 미국 성요한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 그것도 수화로 공부하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 과정에서도 정신부와 미국인 농아 사제인 토머스 콜린 신부의 도움이 컸다. 꼬박 10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가톨릭대 신학대에서 2년 반을 더 공부했다. 다른 신학생보다 2배나 시간이 걸린 공부 때문에 그는 이번 사제서품자 39명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다. 정신부는 “점점 성숙한 모습으로 사제로서의 삶을 정립해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봤다”면서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힘든 세상을 경험한 만큼 신부가 되면 장애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하느님 일을 열심히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서품식에는 한국 첫 청각장애인 사제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40여명의 해외 청각장애 사제, 신자들이 참석할 예정이다. 1이후 7월8일 서울 번동성당에서 일반 신자를 대상으로 첫 미사를 집전하고 15일 수유동 서울가톨릭농아선교회에서 수화 미사를 집전하면서 농아 사제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는 사제 수품의 성경말씀으로 시편 35편5장을 택했다.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주시리라.’ 〈김석종 선임기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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